법은 이제 존재라는 뜻이 있고, 또 진리라는 뜻이 있어요, 존재라는 뜻, 혹은 어 마음의 경계, 뭐 이런 뜻이 있어요, 즉 마음에서 이렇게 감지되는 그 알아차리지 어떤 대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모든 것들, 우리가 제법 할 때 그 일체, 모든 것들 하듯이,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관하는 거예요.
사념처와 법념처
법념처 할 때 그 법을 이제 단마 부른다. 그랬어요 단마, 그런데 이제 소문자 단마, 이제 존재라는 뜻으로 보통은 해석을 하곤 하고, 소문자 단마 일체, 모든 존재,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관을 때. 거기서 이제 대문자 단마, 해서 그 법이 드러난다, 진리가 드러난다.
이제 이런 형식으로 보통 교리에서 설명을 하고 해요 좀 쉽게 말하면: 모든 것들 있잖아요 우리가, 나도 법이에요, 나도 존재죠, 내가 내 몸과 마음을 관하 하고, 또 내가 세상 바깥에 이렇게 지금 산에 꽃이 피고 있는 것을 보기도 하고, 또 하늘을, 바람을 느끼고, 구름을 보고이 모든 것들을 이제 본단 말이죠. 보는데 이 모든 존재, 모든 것들, 내가 볼 수 있는, 마음에 감지되는 모든 것들을. 이제 보게 되면, 어떤. 일이 버러지, 이거 분별로 보게 되면, 중생을 가지고 분별해서 지금까지 우리는 바라봤죠 세상을 자기식대로 자기 식대로 해석해서 바라보면, 자기에게 해석된 세상이 펼쳐집니다.
자기가 그려낸, 자기가 마음으로 그려낸 세상이 허망하게 펼쳐지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허망하게 펼쳐지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진실을 보려면. 우리는 무엇을 보더라도음 그것이 좋거나 나쁘다, 이렇게 해석을 하죠. 그 좋은 건 더 갖고 싶고, 싫은 건 버리고 싶은, 그래서 받고 싶은 욕망, 또 밀쳐내고 싶은 집착심이, 이제 마음들을 가지고 있단 말이죠. 그래서 그렇게 뜻대로 안 되면, 화가 난다 말이죠, 그걸 이제 탐심 진심, 또 치심 이렇게 불러요.
그래서 이렇게 탐진치, 삼독을 가지고 취사 간택시간, 어떻게 하면 법을, 진리를 볼 수 있느냐? 내가 보고 있는,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일체, 모든 을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거, 판단 분별, 생각과 해석을 가지고 보는 것이 걸러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본다, 그걸 이제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다 해서 팔정도 정이라고 한다고 했어요.
근데 이 모든 존재 존재를, 모든 존재를 그냥 통치해 보는 것, 다시 말하면 관이라고 해요, 추고 본다 분별을, 추고 그 본다, 면 그전에는 이것이구나, 것이구나 이름을 붙여서 그것을 봤죠. 근데 이름 붙이는 거는 진실이 아니죠, 진리가 아니죠. 그니까 진리라는 말은 모두에게 통용되는 것이 진리예요.
아프리카에서 우리랑 말이 안 통하는. 아프리카 원주민이 보는 것과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이 다르잖아요. 근데 다른 측면은 분별된 측면 입니다. 근데 거기에 같은 측면이 있단 말, 볼 때도 이름 붙이고, 개념을 입히다 보니까 보자마자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분별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법념처 하게 되면, 어떻게 보일까요?
그냥 볼뿐 알뿐 들을뿐, 그냥 뭔 어떤 작용이, 그냥 이렇게 알아차려 뿐이죠, 그냥 알아차려 뿐이에요, 그냥 알아 인데, 그 알아차리지 대상은 그냥 알아차리기만 하다 보니까 알아차리지, 모든 대상들은 끊임없이 변해요, 무상하게 변해 간단 말이에요, 하나도 고정되게, 이렇게 존재하는 게 없단 말이에요.
인식과 세상
인연이 바뀌면, 대상도 계속해서 바뀐단다, 몸도 계속 변하죠. 그러다 보니까 아, 이것이 고정된 실체로 있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합했을 때 임시로 생겨난 것이구나, 그게 영원하지 않구나, 영원하지 않다는 걸 통찰하게 돼요, 그게 이제 무상과 무화를 깨닫게 된 통찰하는 거죠, 이걸 이제 법이라고 하거든요.
근데 아, 무상하게 변해갈 뿐이구나, 변해가는 인연 따라, 변해가는 것을. 어떻게 고정된 실체라고 할 수 있겠나? 모든 것들은 인연 따라 끊임없이 하는 구나 라는 것을 닫게 되고, 그 변해가는 고정된 자아가 없다, 그냥 볼뿐이지, 거기에 분별을 개입하지 않으면 이름을 부여하지 않겠죠.
그니까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여기면, 거기 이름을 부여하고, 그건 이거야말이에요. 근데 그건 이거 야말 것이 없단 말이에요. 지수 화풍이, 인연 따라 모였다가 흩어질 뿐이란 말이에요. 근데 그 우리가 진짜로 보는 것은, 진짜로 보는 것은, 그것이 이이다 이을 것도 아니고. 이것은 좋은 거다 나쁜 거다, 뭐 생물이다, 무 생물이다, 뭐 나무다 사람이다 무엇이다 무엇이다, 이렇게 드러나는 게 아니죠.
사실은 그건 자기 생각일 뿐이죠, 그냥 무상하게 변화 가는 어떤 찰라를 그냥 보고 있을 뿐이란 말이에요. 이처럼 실제로 우리가 보는 것은. 진실로 보는 것은, 무상한 사실, 끊임없이 변해 간다라는 사실을 그냥 자각할 뿐이거든요. 그러면 그것은 그렇게 변해가는 것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가 없어요.
자아라고 고정된 실체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식대로 왜곡 해석 판단, 분별해서 보게 됐을 때 그것을 실체인 줄 알고, 이건 좋은 거고, 저건 싫은 거야, 그 좋은 건 더 갖고 싶고, 싫은 건 버리고 싶어 하는 이런 분별 망상을 일으킨 말이죠.
그럼 분별 망상을 일으킬 때, 갖고 싶은 걸 못 가지면, 괴롭고 싫은 것을 거부하고 싶은데 거 되지 않을 때 괴로운 이런 괴로움이 생긴단 말이죠, 이처럼 무상과 무아를 바르게 통찰하지 못한, 법이 드러나지 않은, 바르게 통찰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중생들에게는, 그래서 분별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괴로움이 연기된다. 그래서 일체 개고 하죠. 그렇게 분별해서 보는 사람에게는 무상하고 무화를 모르니까 괴로움이 연기되는 거예요.
근데 법을 있는 그대로 지관 멈추고 보는 걸 통해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자각하게 되면, 그냥 변할 뿐인 어떤 순간순간, 을 그냥 알아차리는 것이죠. 거기 고정된 실체적인, 어떤 자아가 없다, 그렇게 바르게 통찰할 때 어디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겠죠.
어떤 것을 특별하게 막 더 좋아, 하거나 어떤 것은 특별하게 더 밀쳐내고, 싫어하려나 하는 거니까 왔다 가는 거지 실체가 아니니까 영원히 내 걸로 이렇게 만들고 쥐 수 있는 무언가가 없으니까 그렇게 됐을 때 어떤 것도 부자와 집착하지 않게 돼요. 그럼 자유로워집니다, 내버려 둔단 말이야요 있는 그대로 인연 따라오고, 인연 따라가는 걸. 그냥 볼뿐이지, 어떤 걸 취하려 하지 않는다.
나쁜 마음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
그런 것을 보고 뭐라고 하느냐면? 아 열반적정이 부릅니다, 그게 바로 열반이란 말이에요. 탐진치 삼독의 불기를 훅 불어 꺼버렸다. 그러니까 우리는 분별할 때는, 취사 간해서, 좋은 건 집착하고, 싫은 건 버리 려고 하고, 취하거나 버리는 일이 잘 안 됐을 때 화가 나는, 이렇게 탐심과 진심 치심 있다가, 그 탐진치 삼독의 불길을 확 불어 버리니까, 열반이 드러나서 적정, 아주 고요해진 말이죠.
마음이 이렇게 법인 혹은 법인이라고 하는 것을 우는 법인이라 그러잖아, 법의 이라 그러잖아, 이건 도장이라는 건, 도장 딱 찍으면 이제, 그때부터 진짜 내게 되듯이, 이거는 딱 명백한 진리다 이제 법인이라고 부르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볼 때, 볼 때 법이 드러난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들은, 우리 중생들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식대로 왜곡하고, 해석해서 바라본다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가 평소에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간단히 말하면: 내가 세상을, 내가 바라보는 모든 세상, 대상을 분별해서 바라보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죠. 이게 이제 우리들이, 우리들의 지금 현실이에요. 즉 내가 세상을 분별해서 보니까. 괴롭다 말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여기 법에 대한 관찰을 보면, 법에 대한 관찰에서는, 옥에 대한 관찰, 온에 대한 관찰 시처 칠각지, 성지에 대한 관찰을, 법에 대한 관찰이라 그래요 법이라는 건 있는 그대로 존재잖아요. 모든 것들이 소리거든요, 모든 것을 보는데, 그 모든 것들이 여기 포섭된다, 말이에요: 모든 것들은 개 오온 처 칠각지 사성제란 말이야, 이게 다섯 개라고. 이렇게 경제에서 말을 했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실상은, 뭐냐면 분별하는 삶의 실상은, 내가 세상이라는 곳을 살아가고 있고, 내가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고, 내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분별해서 보고 있잖아요, 이건 좋고, 저건 나쁘다, 이렇게 분별해서 보고 있잖아요. 내가 세상을 분별해서 괴롭다, 이게 바로 오 개 은 시처, 칠각지 성입니다.
왜 그러냐면 내가 고 할 때, 이제 벌써 내가 세상을 살면서 세상을 분별해서 본다, 그렇기 때문에 괴롭다, 이게 우리의 이제 현실인데 이 천문장부터가 분별이 말이에요. 우리는 나라는 주관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내 바깥에는 세상 대상이 따로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것부터 가서 망상이라는 거예요.
여기가 라고 하는 이것 또한 하나의 존재, 법이다 말이죠, 나다라 할 때, 나라는 것이 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랬죠 나와 세계를 온으로 나눈다 말이에요, 몸과 마음, 색과 수상행식, 이렇게 나눈다 말이죠 즉 여기서 내가 고 할 때 이걸 이제 불교에서는 온이라는 거고 세상을 본다고 하잖아요, 세상을 라고 할 때, 그 세상이라는 게, 세상도 오온에 포섭되고 하고 또 나와 세계를 얘기할 때 처라 해요.
나라는 주관이 눈 깊고, 현 몸 듯이 내 바깥에 있는 색성향미촉법 본다. 이렇게 우리는 분별한다 말이에요, 분별한다 그래서 여기서 내가 세상을 본다 할 때, 바로 여기서 오온과 처를 서라는 거죠, 오온과 처를 있는 그대로 통찰하면서 이 사라지고, 내가 세상을 본다라는 시초의 허망한 망상이 사 라진단 말이에요.
그게 반야심경에서 오온 개고이 했고.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이라고 했던 내용이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세상을, 즉 오온과 18개를 있는 그대로 통찰하면서 실체화시키지 않게 되고, 진실을 커서 법을 보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세상을 분별해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