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한다는 건 둘로 나눈다는 거예요. 좋다거나 나쁘게 바라보죠 세상 모든 것들을, 이건 좋고, 저건 싫어, 이건 옳고, 저건 틀렸다, 이건 길고, 이건 짧다, 이게 둘로 나누어서 본다 말이에요 마음의 경계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공부하고, 수행할 때도. 아, 공부가 잘될 때가 있고, 공부가 안 될 때가 이 씨. 죠, 수행이 잘될 때가 있고, 수행이 안 될 때가 있다.
지혜로운 심신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마음을 자꾸 괴롭히는 그 덮어 버리는, 이게 청정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이런 마음의 요소가 있단 말이죠, 이게 나쁜 요소들, 그 공부를 방해야 하는 나쁜 요소들이, 다섯 가지가 있다는 거죠.
아직 공부하고 수행자가, 공부하는 과정에서, 수행을 하고 있는데 나쁜 쪽으로 분별하면서 보면 또 좋은 현상이 생기잖아요, 막 삼매를 취득하기도 하고, 뭔가 마음이 고요해지고 하고 이런 좋은 것 을 경험하기도 한단 말이죠, 그 좋은 것들을 각지고 불러요.
그래서 즉,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내가 세상에서 공부라고 할 때 두 가지로 나단 말이죠: 좋은 것, 나쁜 것. 그래서 좋은 쪽으로는 칠각지, 나쁜 쪽으로는 개라는게 일어나요 여기서 말하듯이이 법념처. 뭐냐면 개도 있는 그대로 볼뿐, 각지도 있는. 그대로 볼뿐이죠. 법에서는 똑같은 법이란 말이에요, 똑같은 현상 드러난 현상이에요.
그러니까 좋은 일이 일어나도, 그냥 볼뿐, 안 좋은 일이 일어나도, 거기에 끌려가지 않고, 그냥 볼뿐. 또한 내가 세상을 본다 하는, 그것도 그냥 볼뿐. 그러면 이게 내가하는게 진실인가 드러나고, 세상이라는 게 진실인가 드러난다, 거기서 또 내가 일으키는 분별, 도 이게 진실 인가, 이걸 그냥 본단 말이에요.
그러고 나서 분별하고 나니까 괴롭잖아요 괴로움, 그 괴로움 대해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뭔가 내가 지금 괴롭다고 느끼는 것이 정말 괴로움이 맞는가. 괴로움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인가 괴로움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는 어떤 것인가 이 괴로움에 대한 있는 그들의 통찰, 그걸 바로 사성제 그러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보통 이제 내가 세상을 살면서 세상의 모든 것들을 분별해서 바라봐서 근데 그것을 통으로, 통째로 다 있는 그대로 반하는 것 있는 그대로 통찰해, 거기서 그 모든 순간에 진리가 법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 그걸 법념처 아는 말로 표현을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법념처 첫 번째 계라 그랬어요: 오계는 이제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기도 하죠. 뭔가 막 욕망이 일어나잖아요 더 좋은 걸 먹고 싶고, 더 좋은 걸 가지고 싶고. 이런 욕망도 일어나고. 또 수행 중에는네 빨리 깨닫고 싶고, 남들보다 더 고요함을 뭐 증득 하고 싶고. 또 수행을 통해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고 하는. 이런 어떤 감각 욕망이 일어나기도 하고요.
또 악한 마음, 나쁜 마음도 일어나죠. 살다 보면 수행하다,가 이거 해서 뭐 하겠어, 이거 한다고 뭐 뭐가, 뭐 돈이 나오나, 뭐가 나오나, 뭐 쓸데없는 짓 아니야 하고 나쁜 마음들이 일어나기도 하고요. 이렇게 개라는 다섯 가지 어떤, 그 번뇌, 망상들 일어난단 말이죠.
그럴 때 그것을 어 이게 일어났구나 없애야지, 그런 회의적인 의심이 일어날 때 때 아 또 이 이런 망상 일어났네,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네, 난 이렇게 수준 낮은 사람이라서, 나 같은 사람도 공부할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자꾸 분별한다 말이에요, 자기 공부를 되짚으면서, 그래서 질책한다 말이에요.
그러면서 이러면 안 돼 이러거든요 그 자기를 그렇게 규정하는게, 자를 공고히 하는 거잖아요, 무아가 아니라 아를 내세우는 거잖아요. 공부 못 하고 있는 나, 공부가 잘 안 되고 있는 나, 그 자꾸 자기를 강화시키는 거잖아요.
무화 무상의 중요성
그거는 무아가 아니죠, 법이 아니죠, 법인이 아니잖아요. 그럼 사실은 진실은 뭐예요? 내가 분별 일어나든, 졸림이 일어나든, 들뜸이 일어나든, 악한 마음이 일어나든, 그거는 그냥 통찰하는 거예요, 그냥 사념처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볼뿐이라는 거야.
해석하지 않고, 내가 일으킨 생각으로 쥐지 않고, 그냥 본다, 그냥 그냥 보면. 딱 보자마자, 어떨까요 한 생각 일어나서, 이때 공부 잘하는 거 맞아, 한 생각 일어났는데, 그냥 보게 되면, 아 말하자면 그런 거죠 아, 이렇게 일어 났구나 하고 바라본단다 나면 그냥 스르륵 사라져요.
그걸 이렇게 보고 있으면, 그러면 조금 전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단 말이에요, 이렇게 일어날뿐 사라질 뿐. 왔다 갈 뿐 연생 이년, 인연 따라, 그냥 이유는 몰라요, 그냥 생겨났다가 보니까 사라졌다, 그 사실만이 있죠, 그죠 무상하게, 그 무상이라는 사실만이 있지 그걸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야 하고 쥐지 않죠, 그냥 보고 늘어놓다 말이에요.
그걸 내 걸로 쥐게 되면, 내가 맨날 나쁜 생각만 하고, 맨날 감각적 욕망에 달리고, 맨날 오기에 뒤 덮혀서, 나는 수행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수행 못하는 사람이라는 자아를 만들어 내지 않으니까, 무상과 무화를 깨달으니까 일 곡 일체 계곡, 괴로움이 되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냥 통찰하고 내려놔 지니까, 그게 열반적정인구 열반적정이 것이 뭔가 내가 어마어마한 깨달음을 얻거나, 뭐 자성을 깨닫거나 뭐, 뭐 견성을 하거나, 이런 어떤 특정한 사건 일어나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지 않고요.
좀 쉽게 말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우리는 이제 선을 공부하다 보면은 견성한, 뭐 일별 한 또는 뭐 자성을 깨닫는다, 불성을 깨닫는다. 이제 이런 식의 말들을 좋아하곤 하는데: 어, 사실은 그런 허다한 일이 있는 게 아니에요. 그 또한 방편으로 쓴 말이 말에 불과해요.
이 불성 자성 벌레 면목 이 것은 마치 법화경의 화성의 비유와 같이 저 깨달음에까지 가기 위해서 너무 멀다고 생각해서, 사람들이이 시작도 한하 안 하니까, 깨달음까지 갈려려면 너무 못 하겠구나. 싶어서 어떤 성각가 스승이 요 가까이에 있는 불성이란 하나의 화성을 가짜, 화려한 성을 만들어 놨다 말이야요: 야, 요까지만 가면 되는데, 같이 갈까, 저기 가면 너무 좋은 게 많아, 이것이 깨달음과 같아서 너무 좋은 게 많아.
이렇게 하니까: 야, 저까지 못 가지면, 난 여까진 갈 수 있다. 어 그럼, 제가 해보겠습니다 한단 말이죠, 그래서이 견성이란 것을 화성의 비유처럼 만들어 넣었단 말이에요, 세워 났단 말이에요, 그 여기 딱 와서 입고 나면 여기에 잠시 쉬게 해 줘요, 그래서 소를 키우게 해 줘, 여기에서 내가 깨달은 성품을 확인한 다음에 거기 좀 더 익숙해지는 시간을 보내게 하고, 그걸 좀 이제 그 모구라 하듯이 잘 갈고닦는 것 같은, 도노후 점수라고 하듯이, 그런 시간을 보내게 해 주다가, 부도에 보면, 소를 확인하고 견우 모구 소를 키우고, 그러다가 나중에 소도 사라지고, 자기도 사라지죠.
성장을 위한 비유
소 색깔이, 그 누런 소에서 하얀 소로 바뀌, 다가 소가 결국 사라진단 말이에요. 이 화성이 탁 사라져 버린단 말이에요. 그리고 이거는 방편이었다, 그리고 이제 진짜 깨달음의 길로 안내한다 말이죠, 그 이처럼 하나의 방편 입니다.
불성이, 자성이 하는 것도. 실제로는 불성 자성, 이런 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뿐이니까요 문제가 있다가, 문제가 괴로움이 있다가, 괴로움이 사라질 뿐이에요. 분별, 망상 있다가 그 분별이 해결될 뿐이에요. 그러면 아무 일이 없죠, 아무 일이 없는 게 공부예요.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게 공부가 아니고 공부를 했더니, 그래서 이 이렇게 공부하는 과정에 개가 일어나는 것. 이것이 이것을 가지고 자체가 필요 없다, 그랬죠, 그것은 법인을 달는 공부가 아니란 말이에요. 근데 이런 공부 과정에서 좋은 일이 일어나는 거 있잖아요.
여기 이제 각지를 또 있는 그대로 관한고 하는데. 요 각지는 뭐 염지 있는 그대로, 이게 통찰, 알아 차림이 잘 되는 공부 상태 또는 택복 각지 이것이 진리인지, 진리가 아닌지를 잘 이제 선택할 수 있는, 잘 알아볼 수 있는 어떤 법에 대한 안목, 안목이 딱 생기는 어떤 특법 각지, 그리고 또 정진 각지, 내가 정진을 요즘에는 공부가 잘돼, 정진이 잘돼하는 느낌이 있겠죠.
또 이 수행하고, 법문 듣고 공부하다, 보니까 시각지능 해서 기쁨 일어났다가 이제 가벼워져요. 와, 정말 이렇게 가볍게 살 수 있구나. 정말 삶이, 삶의 무게감이 훅 가라앉으면서이 가벼워진, 어떤 경한 각지가 일어나고 또 이제 정각지 이 산매, 늘 산매 아닌 게 없는 거예요. 분별에 깨달 가면서도 그것이 산매 아닌게 없는. 그래서 고요한 아, 이게 진정한 어떤 고요함이, 이게 진짜 매구 이런 걸 이제 이런 상태가 일어나죠.
그리고 이제 각지고 해서 그 어떤 분별이 전부 다 사라진 상태, 완전히 고요해진 상태, 이런 어떤 그 고요한 좋은 공부를 하다 보니까 좋은 상태들이 일어난단 말이에요, 내가 이 각지가 일어나니까: 야, 내가 띠가 잘되는구나 아, 내가 정진이 잘되는구나 야, 내가 목이 생기는구나, 내가 기쁨이 생기 는구나, 뭔 가이 가벼운 마음이 생기는. 구나 산매, 삼매를 정했고요, 그게 망상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각지도 망상이란 말이에요. 즉 각지를 쥐어서 안 된다는 거죠, 붙잡아서 안 된다. 그러니까 보세요, 개라고 하는 나를 뒤덮는 장애도 그게 일어났을 때, 나는 공부 못하는 사람이야 하고 지어서는 안 되죠. 그거는 공부 못한 사람, 자아를 강화시키는 거들이 똑같이 칠각지 마찬가지죠.
내가 공부가 잘 되고 있어, 이렇게 해석해 버리면 어떤 일이 일어난 거예요. 이미 지나간 그 경계를 가지고 쥐고서야, 내가 삼매를 정착했어요, 공부가 잘됐는데, 참 평화로 왔는데, 이런 식으로 그걸 쥐고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공부 잘하는 나를 만들어 낸단 말 깨달은 나를 만들어 내고, 공부가 된 나를 만들어야 낸단 말이에요. 그건 무아가 아니죠.